플러스 성장 속에서도 새로 구워지는 빵이 직전보다 줄어드는 순간, 그해(그 분기)의 신호등은 A구간에서 B구간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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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성장이라는데, 왜 작년보다 팍팍할까
해마다, 혹은 분기마다 나오는 경제 뉴스를 보다 보면 묘한 위화감이 들 때가 있다. 뉴스에서는 “이번에도 플러스 성장을 달성했다”, “실질 GDP가 역대 최고치를 또 경신했다”고 말한다.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도 아니고, 나라 전체 살림 규모는 분명 작년보다 더 커졌다.
그런데 거리와 직장에서 느끼는 공기는 다르다. 기업의 신규 채용 문은 작년보다 좁아졌고, 연봉 협상 테이블은 더 얼어붙었으며, 세금이나 연금·예산을 둘러싼 다툼은 유독 날카롭다. 경제는 커졌다는데 왜 사람들이 체감하는 일상은 “작년보다 올해가 더 팍팍하다”고 느껴질까.
물가나 분배 구조도 물론 영향을 주지만, 그보다 먼저 작동하는 아주 단순한 산수가 하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숨통이 트인다고 느끼는 ‘여유’는 이미 바닥에 깔려 있는 경제 전체 덩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해(또는 그 분기)에 새로 불어나서 사회에 풀리는 ‘새 몫(증가액)’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예금 통장으로 바꿔 보면 바로 이해된다. 통장에 1,000만 원이 들어 있을 때 금리가 5%면 1년 뒤 이자로 50만 원을 받는다. 몇 년 동안 돈을 더 모아 원금이 1,500만 원으로 불어났다고 하자. 통장 잔고는 역대 최고다. 하지만 그사이 금리가 2%로 떨어졌다면 올해 손에 쥐는 새 이자는 30만 원뿐이다. 원금은 1.5배로 커졌는데, 올해 새로 쓸 수 있는 용돈은 예전보다 20만 원이나 줄어들었다.
국가 경제도 똑같다. 경제는 시간이 갈수록 덩치가 커지지만 성장률(속도)은 오르내린다. 매해, 매 분기마다 ‘커진 덩치가 밀어 올리는 힘’과 ‘낮아진 성장률이 깎아 먹는 힘’이 줄다리기를 벌인다. 그리고 직전 기간과 비교한 이 줄다리기의 승패에 따라 그 시점의 경제는 공기가 전혀 다른 두 상태, 즉 A구간과 B구간으로 나뉜다. 앞선 글(「GDP와 파이의 역설」)에서 미분 수식과 거시경제 모형으로 다뤘던 이야기를, 이번에는 복잡한 기호를 덜어내고 매년·매 분기 켜지는 A구간과 B구간의 신호등으로 쉽게 다시 풀어 본다.
A구간: 성장률은 떨어져도 새로 생기는 파이는 커지는 해
흔히 “올해 성장률이 작년보다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면 새로 늘어나는 돈도 당연히 줄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성장률이 완만하게 내려갈 때는 커진 덩치가 속도 감소를 이긴다. 이때 켜지는 초록불이 바로 A구간(덩치 완충 구간)이다.
계산은 곱셈 하나면 충분하다. 한 해 동안 경제에 새로 늘어나는 파이는 (작년 경제 덩치) × (올해 성장률)이다.
- 작년: 경제 규모 1,000조 원인 나라가 4.0% 성장했다. 그해 새로 생긴 파이는 +40.0조 원이고, 덕분에 올해 초 경제의 기초 덩치는 1,040조 원으로 커졌다.
- 올해(A구간): 성장률이 4.0%에서 3.9%로 내려갔다. 뉴스에는 “성장률 둔화”라는 제목이 달린다. 하지만 올해 새로 생긴 파이를 계산해 보면 1,040조 원 × 3.9% = +40.56조 원(약 +40.6조 원)이다.
성장률 숫자는 분명 떨어졌는데, 사회 전체에 새로 풀린 돈과 생산물은 작년(+40.0조 원)보다 오히려 5,600억 원 더 많아졌다. 작년에 불어난 40조 원의 덩치가 쿠션처럼 성장률 하락을 받아 낸 덕분이다. (성장률이 작년보다 아예 올라간 해에는 물론 더욱 넉넉한 A구간이 된다.)
해당 연도나 분기가 A구간에 있을 때는 뉴스가 “성장률이 둔화됐다”고 걱정해도 현장의 체감은 꽤 버틸 만하다. 새로 구워져 나오는 빵의 개수가 직전 기간 이상으로 유지되거나 더 늘어나기 때문에, 누군가의 기존 몫을 빼앗지 않고도 신규 채용을 유지하고 임금과 복지를 조금씩 늘릴 여유가 남는다.
B구간: 플러스 성장인데도 새로 생기는 파이가 쪼그라드는 해
그렇다면 언제 갑자기 “작년보다 팍팍하다”는 체감이 찾아올까. 성장률이 떨어지는 폭이 너무 커서 커진 덩치의 쿠션이 뚫리는 해(또는 분기)다. 이때 켜지는 경고등이 B구간(감속 지배 구간)이다.
방금 본 1,040조 원 경제에서 올해 성장률이 3.9%가 아니라 3.5%로 내려앉았다고 해 보자. 1,040조 원 × 3.5% = +36.4조 원이다.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게 아니다. 엄연히 +3.5% 플러스 성장을 했고, 나라 전체 GDP도 1,040조 원에서 1,076.4조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하지만 올해 사회에 새로 풀린 파이는 작년(+40.0조 원)보다 3.6조 원이나 줄어들었다.
통계 발표(“GDP 사상 최대, 플러스 성장 지속”)와 시민들의 체감(“작년보다 확실히 살기 팍팍해졌다”)이 엇갈리는 핵심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는 기존 1,040조 원의 파이는 그대로인데, 올해 새로 구워져 나와 청년 일자리, 임금 인상분, 신규 사업 기회, 새 복지 예산으로 나눠 쓸 수 있는 여분의 빵만 40조 원에서 36.4조 원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B구간이 켜진 해에는 누군가의 몫을 늘리려면 다른 누군가의 몫이 줄어들기 쉽다. 연금, 세금, 직군 간 보상을 둘러싸고 “네가 더 가져가면 내 몫이 깎인다”는 제로섬 갈등이 거세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저성장 국가의 함정: 2% 경제의 쿠션은 종잇장처럼 얇다
그해가 A구간이 될지 B구간이 될지 가르는 커트라인은 어디에서 정해질까. 원리는 간단하다. 직전 기간에 경제 덩치가 4% 커졌다면, 이번 기간의 성장률이 원래 성장률에서 약 4% 비율 이상 깎이지 않아야 직전만큼의 새 파이(+40조 원)를 지킬 수 있다(4.0% ÷ 1.04 = 3.85%).
이 단순한 산수에서 저성장 국가가 겪는 까다로운 함정이 드러난다. 기초 성장률이 낮은 나라일수록 A구간을 지켜 주는 ‘덩치 쿠션’ 자체가 종잇장처럼 얇아진다는 점이다.
| 경제 단계 | 직전 성장률 | A구간을 지키는 이번 커트라인 | A구간이 버텨 주는 여유 폭 (쿠션 두께) |
|---|---|---|---|
| 고성장 경제 | 10.0% | 9.09% 이상 | 0.91%p 하락까지 방어 (두꺼운 쿠션) |
| 중성장 경제 | 4.0% | 3.85% 이상 | 0.15%p 하락까지 방어 (얇아진 쿠션) |
| 저성장 경제 | 2.0% | 1.96% 이상 | 0.04%p 하락까지 방어 (종잇장 쿠션) |
10%로 달리는 신흥국은 한 해에 덩치가 10%나 불어나기 때문에 쿠션이 두껍다. 이듬해 성장률이 10.0%에서 9.2%로 0.8%p나 뚝 떨어져도 여전히 A구간에 머물며 새 파이가 작년보다 더 커진다. 반면 2%로 성장하는 성숙 경제는 1년 동안 불어난 덩치 쿠션이 2%밖에 되지 않는다(분기 성장률 0.5% 기준으로는 쿠션이 0.0025%p에 불과하다). 수출이나 내수가 살짝 흔들려 연간 성장률이 2.0%에서 1.9%로 단 0.1%p만 내려앉아도 곧장 B구간 불이 켜진다. 저성장 선진국일수록 매해·매 분기 B구간의 찬바람을 훨씬 자주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A와 B는 10년짜리 이름표가 아니라 ‘매년·매 분기’ 켜지는 신호등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A구간과 B구간은 10년 단위로 뭉뚱그려 붙이는 고정된 이름표가 아니라, 매년(또는 매 분기) 직전 기간과 비교해 판정하는 실시간 신호등이라는 사실이다.
현실 경제는 매끈한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출 선적이 몰리는 분기도 있고, 금리나 유가가 출렁이는 해도 있다. 그래서 고성장하던 1980~1990년대 한국 경제에도 경기가 숨을 고르는 해(1989년, 1992년)에는 어김없이 B구간이 켜졌고, 반대로 저성장기인 요즘에도 반등하는 해나 분기에는 A구간이 켜진다. 특히 분기 단위로 보면 계절 요인이나 일시적 충격 때문에 1~2개 분기쯤 B구간에 들어서는 일은 아주 흔하다.
따라서 “이번 분기(또는 올해) B구간이 켜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라 경제의 엔진이 고장 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건강한 경제라도 2~4개 분기(1년 남짓) 비를 피하러 B구간을 통과한 뒤 다시 A구간으로 힘차게 복귀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진짜 차이는 개별 시점의 B 진입 여부가 아니라, 매년·매 분기 신호등이 쌓였을 때 나타나는 패턴의 변화에 있다.
실제 한국 경제의 최근 13년(2013~2025년, 세계은행 WDI 2015년 불변 달러 기준)을 해마다 직전 연도와 비교해 A·B 신호등을 찍어 보면 그 차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 2013~2017년의 리듬 (A · A · B · A · A): 5년 중 4번이 A구간이었다. 특히 2014년은 성장률이 직전 해 3.3%에서 3.2%로 살짝 내려갔는데도 커진 덩치 쿠션이 감속을 막아 내며 새 파이가 +462억 달러에서 +466억 달러로 오히려 커졌다. 2015년에 한 차례 B구간을 거쳤지만 딱 1년 만에 A구간으로 복귀해 2017년(+545억 달러)까지 새 파이를 계속 키웠다.
- 2018~2025년의 리듬 (B · B · B · A · B · B · A · B): 2%대 저성장으로 쿠션이 얇아지면서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8년 중 6번이나 B구간 불이 켜졌고, 한 번 B구간에 들어가면 2~3년 연속 머무는 일이 잦아졌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A구간이 다시 켜졌을 때의 높이다. 코로나 역성장(-0.7%) 직후의 기저효과 반등(2021년)을 제외하면, 2024년에 모처럼 A구간(+377억 달러)이 켜졌을 때도 예전 평시 A구간(2016~2017년 +488억~+545억 달러)의 높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이듬해(2025년 +193억 달러) 다시 B구간으로 내려앉았다.
나쁜 B구간을 가려내는 세 가지 눈금과 인구 체크
결국 매 분기나 매년 성적표가 발표될 때, 그것이 자연스러운 숨고르기(혹은 성숙한 선진국이 되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감속)인지 아니면 기초 체력이 깎이는 진짜 침체 신호인지는 아래 세 가지 눈금으로 가려낼 수 있다.
- 빈도 (얼마나 자주 켜지는가): 최근 몇 년, 혹은 최근 열 몇 개 분기의 기록표에서 A보다 B가 압도적으로 자주 찍히기 시작했는가?
- 지속성 (얼마나 오래 머무는가): 2~4개 분기(1년 안팎) 숨을 고르고 곧장 A로 복귀하는가, 아니면 몇 년 연속 B구간에 갇혀 있는가?
- 회복 탄력 (A가 켜졌을 때 깎인 몫을 되찾는가): 불황기에 문을 닫은 회사와 일자리를 잃은 숙련 인력이 경기 회복 뒤에도 돌아오지 못하면(경제학에서는 흉터가 남는다는 뜻으로 이력 현상이라 부른다), 간신히 A구간 반등이 찾아와도 예전 높이를 되찾지 못하고 B구간이 갉아먹은 폭이 A구간이 채운 폭보다 점점 더 커진다.
여기에 한국처럼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라면 매년 성적표를 볼 때 한 가지만 더 떼어 보면 된다. 나라 전체의 파이는 (일하는 사람 수) × (1인당 만들어 내는 가치)다. 일하는 사람 수가 줄어 나라 전체 성적표에 B구간이 자주 켜지더라도, 1인당 새로 만들어 내는 가치(1인당 증가액)가 매년 A구간을 자주 켜며 버티고 있다면 기술과 생산성은 여전히 건강하게 전진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1인당 성적표에서마저 B구간이 일상이 되고 반등 높이가 낮아진다면, 그때는 인구 핑계를 넘어 기술 혁신과 일하는 방식 자체를 고쳐야 한다는 경고등이다.
정리: 분기·연간 성장률 뉴스를 읽는 두 개의 질문
매 분기, 매년 발표되는 “성장률 몇 %”라는 숫자 하나만으로는 왜 우리의 일상이 작년보다 팍팍해졌는지, 또 이 답답함이 잠시 지나가는 바람인지 구조적인 변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제 새 성장률 속보가 나오면 복잡한 수식 대신 두 가지만 확인해 보면 된다.
- 첫째, 이번 기간(올해·이번 분기)의 성장률은 커진 덩치가 감속을 막아 내는 ‘A구간’ 커트라인 위에 있는가, 아니면 새로 구워지는 빵 자체가 직전보다 줄어드는 ‘B구간’으로 내려갔는가?
- 둘째, 최근 몇 년·몇 분기의 신호등을 나란히 늘어놓았을 때 B구간은 잠시 스쳐 가는 손님인가, 아니면 반등 높이를 낮추며 점점 더 자주, 길게 눌러앉고 있는가?
경제가 커졌다는 통계와 작년보다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체감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전체 GDP가 사상 최고치를 찍는 해에도, 그해 새로 구워져 나오는 한 조각이 작년보다 작아지는 순간 세상의 공기는 A구간에서 B구간으로 바뀐다. 중요한 것은 성장률이 흔들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매해·매 분기 찍히는 A와 B의 리듬 속에서 우리 경제의 쿠션과 회복 탄력이 살아 있는지를 읽어 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