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계 군사집단의 백제 편입과 재지화 과정이라는 가설을 중심으로 ―
### 국문초록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전방후원분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이라는 제한된 시기에 출현하여 비교적 단기간 존속한 뒤 소멸한다. 그 피장자의 성격에 대해서는 영산강유역 재지수장설, 왜계 이주민설, 왜계 백제관료·군사집단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특히 전방후원형 분구와 북부 규슈계 횡혈식석실 등 왜계 요소가 확인되는 동시에 백제계 장송의례와 위신재가 공존한다는 점은 피장자를 단일한 문화적 범주로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
본고는 이러한 현상을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조의 479년 기사와 연결하여 재검토한다. 해당 기사에는 말다왕, 즉 후일의 동성왕이 백제로 귀국할 때 병기와 함께 「筑紫國軍士五百人」, 곧 축자국 군사 500인이 호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고는 이 가운데 일부가 백제에 잔류하였으며, 그 상층 무장 또는 이들과 직접 연계된 왜계 유력자들이 백제 왕권의 필요에 따라 영산강·서남해 수로상의 전략거점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한다.
그러나 모든 전방후원분 피장자를 479년 입국집단으로 일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기에는 일본열도에서 건너온 왜계 군사·유력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으나, 이들이 백제 정치질서에 편입되고 영산강 재지세력과 결합하면서 1~2세대에 걸쳐 백제화·재지화되었다고 본다. 그 결과 후기에는 왜계 후손뿐 아니라 왜계 묘제를 정치적 권위의 표현으로 수용한 재지수장까지 전방후원분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백제의 지방지배가 강화됨에 따라 이러한 과도기적 묘제 역시 소멸하였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함평 신덕 1호분의 북부규슈계 석실과 백제 중앙식 장송의례의 공존, 신덕 2호분에서 나타나는 능산리형 석실로의 변화, 광주 월계동 1·2호분의 세대적 연속성, 고창 칠암리 고분의 상대적으로 이른 편년, 광주 명화동 및 해남 용두리 고분의 후기적 위치는 이러한 시간적 변화 모델을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영산강 전방후원분은 하나의 고정된 민족집단의 묘제가 아니라 5세기 말 이후 백제 왕권, 규슈계 군사·해상세력 및 영산강 재지세력 사이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인 정치묘제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
**주제어:**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 장고분, 동성왕, 축자국 군사 500인, 왜계 백제인, 북부 규슈, 재지수장, 백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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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은 한반도 고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고고학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열도 고분문화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형 분구가 한반도 서남부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백제·왜·영산강 재지세력 사이의 정치적·인적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현재 호남지역에는 약 15기 내외의 전방후원분이 알려져 있으며, 이문형은 13개 유적 15기로 집계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대체로 5세기 말~6세기 초라는 짧은 기간에 출현하며, 나주 대형 옹관고분의 핵심지역을 피해 외곽 수로상의 요충지에 단독 또는 소수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주요 특징으로 지적하였다.
피장자를 둘러싼 논쟁은 크게 재지수장설과 왜계 피장자설, 그리고 이 둘의 중간에 위치하는 왜계 백제관료·군사집단설로 나눌 수 있다. 최근 김영심은 피장자를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다수는 백제 중앙의 관할 아래 일정한 자율성을 가졌던 영산강유역 재지세력가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특히 해안·수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재지세력가에 주목한다.
본고는 양자를 반드시 배타적인 견해로 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즉 전방후원분의 약 반세기에 걸친 존속기간 동안 피장자의 성격 자체가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한다.
**왜계 외래 군사·유력자의 유입
→ 백제 왕권에 의한 활용
→ 백제 정치체제 편입
→ 재지세력과의 혼인·결합
→ 2세대 이후 백제화·재지화
→ 전방후원분의 소멸**
이라는 역사적 과정이다.
그 출발점으로 본고가 주목하는 사건이 479년 동성왕의 귀국과 축자국 군사 500인의 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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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479년 축자국 군사 500인과 백제의 정치상황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조에는 곤지의 아들 말다왕을 백제로 보내면서 병기를 주고,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즉 축자국 군사 500명을 함께 보내 호위하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말다왕은 이후 백제의 동성왕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사를 단순히 ‘왜병’이라고 하지 않고 **축자국 군사**라고 특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록 자체를 받아들인다면 이 집단은 적어도 규슈의 축자지역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군사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문주왕·삼근왕을 거쳐 동성왕이 즉위하는 과정은 백제 왕권과 귀족세력의 관계가 크게 재편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외에 체류하던 왕위계승자가 500명이라는 상당한 수의 무장인력과 함께 귀국하였다는 기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문헌이 직접 증명하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축자국 군사 500인이 동성왕을 호위하여 백제로 갔다”**는 데까지이다.
그들이 백제에 잔류했는지, 잔류했다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 영산강 전방후원분 피장자와 관계가 있었는지는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하의 논의는 문헌사료와 고고학 자료를 결합하여 검증하는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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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Ⅲ. 479년과 전방후원분 출현시기의 관계
전방후원분과 479년 기사의 관계에서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연대이다.
호남지역 전방후원분은 대체로 **5세기 말~6세기 전반**에 집중된다. 이문형 역시 그 출현을 5세기 말~6세기 초의 한시적인 현상으로 파악한다.
특히 현재 가장 이른 단계의 전방후원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고창 칠암리 용산고분**은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길이 약 56m의 비교적 대형 고분이며 주구와 이중 주제, 원통형 토기 등을 갖추고 있다. 백제토기·철촉·마구부속품과 일본계 토기 등 서로 다른 계통의 유물이 함께 확인되었다.
5세기 후반이라는 편년만으로 정확히 479년 이전·이후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칠암리 고분의 절대연대가 향후 **470년대 초·중반**으로 확정될 경우 479년 군사집단을 전방후원분 발생의 직접적인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는 약화된다.
반대로 **480~490년대**로 좁혀진다면 479년 사건과의 관련성은 크게 강화된다.
따라서 본 가설에서 칠암리 고분의 정밀편년은 일종의 ‘판정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령 일부 왜계 요소가 479년 이전부터 존재하더라도 본 가설이 전면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백제·영산강·규슈 사이의 인적 교류 자체는 479년에 처음 시작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고가 상정하는 것은
**479년 = 왜계 교류의 시작**
이 아니라,
**479년 = 기존의 해상·인적 네트워크에 정치적 목적을 가진 상당한 규모의 축자계 군사집단이 새롭게 투입된 사건**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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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 공간분포와 군사거점 가설
호남지역 전방후원분의 특징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분산성이다.
이문형은 전방후원분이 나주 옹관고분의 핵심지역을 피하여 외곽 수로상의 주요 지점에 위치하고, 하나의 대형 공동묘지를 이루기보다 개별 또는 소수로 조영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이주민 공동체 모델과 약간 다른 양상이다.
예컨대 축자국 군사 500인 전체가 한곳에 정착하여 독립적인 왜계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면 대규모 집단묘역의 존재를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전방후원분의 분포는 오히려 서로 떨어진 여러 거점에 소수의 고위 묘역이 존재하는 형태에 가깝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가설적 구조를 설정할 수 있다.
**동성왕**
↓
**축자국 군사 500인**
↓
**몇 개의 하위 군사집단**
↓
**영산강·서남해 수로상의 전략거점 분산배치**
↓
**각 집단의 상층 지휘자**
↓
**일부가 전방후원분의 피장자가 됨**
500명을 예컨대 5~10개의 집단으로 나누면 단순 산술상 한 집단당 50~100명 정도가 된다.
이는 실제 고대 군제의 조직을 복원한 수치가 아니다. 다만 전방후원분의 수와 공간분포가 500명 규모의 군사집단이 여러 전략거점으로 분산되는 모델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고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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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Ⅴ. 초기 피장자의 성격: 왜계 출신 백제 유력자
전방후원분의 피장자가 단순한 왜인 또는 단순한 영산강 재지인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가장 좋은 사례가 **함평 신덕 1호분**이다.
2025년 최영은의 연구에 따르면 신덕 1호분의 매장시설은 **북부규슈형 횡혈식석실에 기원을 둔다.**
반면 피장자를 안치하는 방식에서는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 관대의 설치, 피장자를 현실의 장축과 평행하게 안치하는 방식 등 **백제 중앙의 장송규범이 강하게 작용한다.**
또한 부장품에는 현지산·백제 중앙산·일본열도산 등 여러 계통이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신덕 1호분의 구조는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묘제·석실의 계통 → 북부 규슈**
**실제 매장행위 → 백제 중앙**
**부장품 → 백제·왜·현지의 다원적 구성**
이 현상은 피장자를 한 가지 민족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기보다, 서로 다른 정치·사회적 네트워크를 동시에 가진 유력자로 해석하게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물을 **왜계 출신으로 백제에 편입된 군사·정치적 유력자**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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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Ⅵ. 개별 고분의 편년과 문화요소 비교
본 가설의 핵심은 전방후원분 전체를 하나의 시간평면에 놓지 않는 데 있다.
오히려 개별 고분을 편년순으로 배치하여 왜계·백제계·영산강 재지계 요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 비교적 자료가 확보된 주요 고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고분 | 대략적 편년 | 주요 왜계 요소 | 백제·재지계 요소 | 본 가설에서의 위치 |
|—|—|—|—|—|
| **고창 칠암리 용산고분** | 5세기 후반 | 전방후원형, 원통형토기, 일부 일본계 토기 | 백제토기·철기·마구 등 복합 | **최초기 단계 후보** |
| **함평 신덕 1호분** | 5세기 말~6세기 초 전후 | 북부규슈형 석실, 전방후원형 묘제 | 백제 중앙식 장송의례, 백제계 위신재 및 다원적 부장품 | **왜계 백제 유력자 모델의 핵심 사례** |
| **광주 월계동 1호분** | 6세기 전후 | 방패형 주구, 굴식돌방, 원통형 토제품 등 북부규슈와 관련 | 은제 관못·목관 관고리 등 백제 장제 | **혼합·2세대화 단계** |
| **광주 명화동 장고분** | 6세기 전반 | 전방후원형, 원통형토기 | 금동 귀걸이·철촉·띠고리·토기 등의 복합 구성 | **후기적 혼합단계** |
| **광주 월계동 2호분** | 6세기 중엽 | 전방후원형, 방패형 주구, 원통형 토제품 전통 지속 | 지역화된 석실·토기·철기 | **후기·재지화 단계** |
| **해남 용두리고분** | 발굴단 견해상 6세기 중반 | 전방후원형이라는 분형 | 석실 축조의 지역적 변형과 제한된 부장품 | **최후기 단계 후보** |
| **함평 신덕 2호분** | 신덕 1호분 이후 | 1호분과 입지·방향 등 전통 공유 | **원분 + 백제 능산리형 석실** | **전방후원분 소멸·백제화의 중요 사례** |
이 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유물 한두 점이 아니라 **전체 방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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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창 칠암리 용산고분: 최초기 단계
칠암리 고분은 현재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 가운데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하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으며,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분구 길이는 약 56m로 상당히 크다. 주구와 이중의 주제를 갖추며 분구 주변에는 원통형 토기가 사용되었다. 유물에서는 백제계 토기와 철촉·마구부속품뿐 아니라 일본계 토기가 함께 확인된다.
따라서 칠암리 고분은 초기부터 문화요소가 완전히 왜계 일색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본 가설을 보다 정교하게 만들 필요성을 제기한다.
즉 초기 단계조차
**순수한 왜인 → 이후 백제화**
라는 단순구조라기보다는,
**왜계 출신 또는 왜계 네트워크를 가진 유력자가 백제·영산강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부터 이미 혼합문화가 형성**
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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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함평 신덕 1호분: 가설의 핵심 사례
신덕 1호분은 본 가설의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매장시설은 북부 규슈 횡혈식석실에 기원을 두지만 매장행위에서는 백제 중앙의 장송규범이 확인된다. 최영은은 이러한 묘제와 장제 사이의 이원성 자체가 피장자의 복합적인 사회관계를 보여준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신덕 피장자를 단순히
**“왜인”**
또는
**“영산강 토착수장”**
중 하나로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북부 규슈와 출자 또는 강한 관계를 가진 인물 + 백제 정치질서 안에서 높은 사회적 위치를 누린 인물**
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479년 축자국 군사 500인의 상층 무장설을 적용할 경우 이러한 형태가 가장 예상에 가까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장자를 실제 ‘500인의 지휘관’이라고 확정할 직접 자료는 없으므로, 신덕 1호분은 **가설과 높은 정합성을 가진 사례**로 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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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광주 월계동 1호분: 문화적 혼합의 심화
월계동 장고분은 1·2호분으로 구성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최근 정리에 따르면 1호분은 **6세기 전후**, 2호분은 **6세기 중엽**으로 알려져 있다.
1호분에서는 전방후원형 분구, 방패형 도랑, 굴식돌방, 돌널, 원통형 토제품 등의 요소가 일본 북부 규슈지역과 연결된다.
그런데 동시에 널방에서 **은제 관못과 목관의 관고리**가 출토되어 백제 장제의 영향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사례는 본 연구가 상정하는 **문화적 혼합단계**와 잘 부합한다.
외형적인 묘제 정체성은 여전히 왜계 전통을 강하게 유지하면서도, 실제 피장자의 장례를 집행하는 방식에서는 백제의 규범이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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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명화동 장고분: 6세기 전반의 지역적 변형
광주 명화동 장고분은 **6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정리된다.
길이 약 33m로 비교적 소형이며, 전방후원형 분구와 함께 연결부를 따라 원통형 토기가 배치되어 있다.
출토품으로는 금동귀걸이, 철촉, 띠고리, 토기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 전방후원분 전체의 형태를 비교하면 초기의 신덕·자라봉·용두리 계열과 명화동·월계동 계열 사이에서 분구 형태와 주구 등이 변하는 시간적 추이가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후기 전방후원분을 단순히 초기 왜계 묘제의 복제품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한반도 남서부에서 자체적인 변형과 재해석이 지속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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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월계동 2호분: 두 세대의 가능성
월계동 2호분은 특히 중요하다.
1호분과 같은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축조시기는 **6세기 중엽**으로 알려져 있어 두 고분이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칠암리와 함께 월계동 고분을 **두 세대에 걸쳐 조성된 전방후원분**으로 설명한다.
이 사실이 정확하다면 피장자 집단을 연구할 때 ‘한 번의 왜인 이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호분 피장자와 2호분 피장자가 혈연 또는 정치적인 계승관계였을 경우,
**1세대 → 2세대**
라는 실제 시간축을 고고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6세기 중엽의 2호분 피장자를 479년에 입국한 군사 당사자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입국자의 후손**
**해당 군사거점을 계승한 후임자**
또는
**왜계 묘제의 권위를 계승한 재지 유력자**
로 이해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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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해남 용두리고분: 479년 당사자설의 한계
용두리고분은 발굴조사 당시 석실구조와 다른 전방후원분의 출토자료를 비교하여 **6세기 중반 무렵**의 축조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이 편년을 따른다면 용두리고분 피장자를 479년에 입국한 축자국 군사 당사자로 보는 것은 연령상 상당히 어렵다.
따라서 이 사례는 오히려 본 가설에서 중요한 반증장치가 된다.
즉,
**모든 전방후원분 = 479년의 군사 500인**
이라는 단순한 등식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신 후기 고분은
**왜계 2세대 또는 후계집단**
혹은
**전방후원분의 정치적 권위를 받아들인 영산강 재지수장**
으로 설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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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Ⅶ. 신덕 1호분에서 신덕 2호분으로: 백제화 과정의 미시적 사례
2026년 서정석의 연구는 이 논문의 가설에 특별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신덕 2호분은 전방후원분인 신덕 1호분에서 불과 약 **12m** 떨어져 있다.
그러나 신덕 2호분은 전방후원분이 아닌 **원분**이며, 매장시설도 **백제 능산리형 석실**이다.
그럼에도 두 고분은 동일한 입지, 지상식 축조, 동서 방향의 석실 장축 및 서쪽 출입구 등 여러 특징을 공유한다. 서정석은 이를 근거로 신덕 2호분을 사실상 신덕 1호분 문화의 **후예**로 파악한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신덕 계열만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덕 1호분**
전방후원분
+ 북부규슈형 횡혈식석실
+ 백제 중앙식 장송의례
+ 왜·백제·현지계 부장품
↓
**신덕 2호분**
원분
+ 백제 능산리형 석실
+ 신덕 1호분과 동일한 지역적·장례적 계승성
이 변화가 실제 동일 계통 집단의 세대적 변화라면, 이는 본고에서 제시하는
**왜계 유력자 → 백제 편입 → 후손의 백제화 → 왜계 묘제 소멸**
이라는 모델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특히 여기에서는 단지 ‘백제 유물이 많아졌다’는 차원을 넘어 **무덤의 외형 자체가 전방후원분에서 원분으로 변화하고, 석실 역시 백제 중심묘제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신덕 1·2호분의 관계는 향후 본 가설을 검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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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Ⅷ. 초기-중기-후기 단계의 재구성
이상의 자료를 종합하면 영산강권 전방후원분을 다음과 같은 역사적 단계로 가설화할 수 있다.
## 1단계: 유입기 ― 약 470년대 후반~490년대
이 단계에서는 일본열도에서 직접 건너온 왜계 유력자의 비중이 비교적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479년 동성왕의 귀국과 축자국 군사 500인의 이동 역시 이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던 백제-영산강-규슈 교류망 위에서 이러한 이동이 이루어졌으므로, 초기 고분부터 복합문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대표 후보:
**고창 칠암리 용산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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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단계: 백제 편입기 ― 약 490~510년대
왜계 출신 유력자 또는 그 집단의 상층부가 백제의 정치·군사 질서 안에 본격적으로 편입된다.
자신의 출자와 관련된 전방후원형 묘제와 북부규슈계 석실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장송의례와 위신재에서는 백제 중앙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대표 후보:
**함평 신덕 1호분**
이 단계가 479년 축자국 군사 상층부와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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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단계: 혼합·2세대화 ― 약 500~530년대
백제에서 태어난 2세대 또는 영산강 재지사회와 혼인·결합한 집단이 성장한다.
전방후원형이라는 외형은 유지하지만 백제 장송의례가 더욱 깊숙이 침투한다.
대표 후보:
**광주 월계동 1호분
광주 명화동 장고분**
이 단계부터 피장자의 생물학적 출자를 묘제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특히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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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단계: 재지화·백제화 ― 약 530~550년대 이후
피장자가 왜계 후손이라 하더라도 여러 세대 동안 백제사회 안에서 활동했으므로 실질적으로 백제 지방엘리트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동시에 영산강 재지 유력자가 전방후원분의 정치적 권위를 수용했을 가능성도 커진다.
대표 후보:
**월계동 2호분
용두리고분**
이 시점의 피장자를 ‘왜인’이라고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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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단계: 소멸기
마지막 단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이라는 외형 자체가 사라지고 백제계 묘제로 수렴한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신덕 1호분 → 신덕 2호분**
의 변화이다.
이 단계에서 외래계 엘리트와 재지엘리트의 정치적·문화적 구별 자체가 약화되고, 백제 지방통치체제 속의 유력자로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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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Ⅸ. ‘왜인설’과 ‘재지수장설’의 통합 가능성
이러한 시간축을 도입하면 기존의 피장자 논쟁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존 논쟁에서는 흔히
**A. 실제 왜인이 묻혔다.**
와
**B. 영산강 재지수장이 일본식 묘제를 받아들였다.**
가 서로 경쟁하는 설명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약 반세기의 시간차를 가진 전방후원분 전체의 피장자가 동일한 출신집단이라고 전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다음 두 과정이 동시에 발생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 첫 번째 방향
**왜계 인물**
→ 영산강 정착
→ 백제 관료·군사체제 편입
→ 재지 유력가문과 혼인
→ 후손의 백제화
### 두 번째 방향
**영산강 재지수장**
→ 왜계 군사·해상세력과 정치적 관계 형성
→ 전방후원분이 갖는 새로운 정치적 권위 인식
→ 묘제 선택
따라서 후기 단계에서는 두 집단의 고고학적 표현이 서로 가까워질 수 있다.
이는 왜인설과 재지수장설 가운데 하나만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가 틀렸다기보다 **서로 다른 시기의 전방후원분을 설명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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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Ⅹ. 479년 ‘500인 지휘관설’의 위치
이상의 모델에서 479년 축자국 군사 500인설은 다음과 같이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본고는
**전방후원분 15기 = 축자군 500인의 지휘관 15명**
이라는 단순등식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 **479년 백제로 건너온 축자국 군사 500인 가운데 일부가 백제에 잔류하였고, 그 가운데 상층 군사유력자 또는 그들과 직접 연계된 왜계 인물이 초기 영산강 전방후원분 피장자의 일부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라고 본다.
이후 고분은 그 후손 또는 정치적 후계자까지 포함할 수 있다.
따라서 500인의 직접적 역사적 영향은 **초기 단계에 가장 강하고 후대로 갈수록 약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를 모형화하면 다음과 같다.
**479년**
축자국 군사 500인 동성왕 호위
↓
**480~500년**
일부 백제 잔류
상층 무장의 전략거점 배치
↓
**490~510년**
초기 전방후원분
왜계 출신 백제 유력자
↓
**500~530년**
2세대·혼합 엘리트
백제 장송요소 증가
↓
**530~550년**
재지수장 및 완전히 백제화된 후손
↓
**6세기 중엽 전후**
전방후원분 소멸
백제계 묘제로 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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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I.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핵심 예측
본 가설은 역사적 상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설이 옳다면 실제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
### 1. 편년
가장 왜계성이 강한 전방후원분이 상대적으로 앞서야 한다.
특히 최초기 고분의 절대연대가 **479년 직후와 집중적으로 겹친다면** 500인설은 강화된다.
반대로 다수의 전방후원분이 479년보다 명백하게 앞선다면 가설은 크게 약화된다.
### 2. 석실
초기에는 북부규슈계 석실의 특징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후기에는 백제계·지역화된 석실이 증가해야 한다.
### 3. 장송의례
초기부터 백제 영향이 존재하더라도 후대로 갈수록 백제식 목관·관못·관고리·피장자 안치 방식 등의 비중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 4. 부장품
초기에는 일본열도계·군사적 유물의 상대적 비중이 높고,
후기로 갈수록 백제 중앙계·영산강 재지계 물품의 비중이 증가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 개수보다는 **제작지·기능·위신체계**를 구분하여 분석해야 한다.
### 5. 인골
가장 결정적인 검증수단이다.
본 가설이 옳다면 초기 피장자 가운데 일부에서는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 양립하는 성장환경이 검출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야 한다.
반면 후기 피장자에서는 영산강 지역에서 성장한 인물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트론튬·산소동위원소, 고대 DNA 및 치아의 형태학적 분석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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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II. 본 가설의 반증 가능성
본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오면 수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첫째, 초기 전방후원분 피장자의 자연과학적 분석에서 대부분이 영산강에서 출생·성장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이다.
둘째, 가장 이른 전방후원분들이 479년보다 수십 년 앞선 것으로 확정될 경우이다.
셋째, 편년이 내려갈수록 왜계 요소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관되게 강화될 경우이다.
넷째, 전방후원분의 공간분포가 군사·해상교통 요충지와 의미 있는 관계가 없다는 결과가 나올 경우이다.
다섯째, 신덕 1호분과 신덕 2호분 등 연속성을 상정한 고분 사이에 실제 계승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500인설’을 미리 사실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 있는 가설**로 설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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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III. 맺음말
본고는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를 고정된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하기보다 약 반세기 동안 변화한 정치적·사회적 집단으로 파악하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 출발점으로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조의 479년 축자국 군사 500인 기사를 주목하였다.
479년이라는 시기와 전방후원분의 출현시기는 매우 근접한다.
사료에는 축자국이라는 구체적인 지역이 등장하는 한편, 영산강 전방후원분의 일부 석실과 장례요소 역시 북부 규슈지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또한 전방후원분이 나주 중심부에 집단적으로 자리하지 않고 영산강·서남해 교통망의 외곽 요충지에 소수씩 분산되는 현상은 외래 군사집단을 전략적으로 분산배치하였다는 가설과 일정한 정합성을 가진다.
특히 함평 신덕 1호분은 중요한 자료이다.
이 고분에는 북부규슈형 매장시설과 백제 중앙식 장송의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피장자를 ‘왜인’ 또는 ‘백제인’ 가운데 하나로만 규정하기보다 **왜계 출자를 가지면서 백제 정치체제에 깊숙이 편입된 고위 유력자**로 이해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자료는 신덕 2호분이다.
신덕 1호분과 불과 약 12m 떨어진 후속 고분에서 전방후원형 분구가 사라지고 원분이 등장하며, 매장시설 역시 백제 능산리형 석실로 변화한다는 사실은 동일 지역 유력집단이 빠르게 백제 묘제 안으로 수렴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광주 월계동에서도 비슷한 시간적 관찰이 가능하다.
1호분은 6세기 전후, 2호분은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고 두 세대에 걸친 전방후원분 조영 가능성이 지적된다. 특히 북부규슈계 묘제·장식 요소와 은제 관못·관고리 등 백제 장제가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를 가장 일관되게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 **5세기 후반 백제와 규슈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해상·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479년 동성왕의 귀국 때 축자국 군사 500인을 포함한 새로운 왜계 군사세력이 백제에 유입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 상층 군사유력자 또는 이들과 직접 관련된 왜계 인물이 백제 왕권에 의해 영산강·서남해의 전략거점에서 활용되었으며, 초기 전방후원분 피장자의 일부가 이 집단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백제 왕권의 정치질서에 편입되면서 백제식 위신재와 장송의례를 수용하였다. 이후 재지 유력가문과의 혼인 및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왜계 후손은 빠르게 백제화·재지화되었고, 동시에 영산강 재지수장 일부가 전방후원분이라는 권위적 묘제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후기 전방후원분 피장자는 초기의 왜계 군사유력자와 동일한 집단이 아니라 백제화된 후손·정치적 후계자 및 재지세력가를 포함한 복합집단으로 변화하였으며, 6세기 중엽 백제의 지방지배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별도의 전방후원형 묘제를 유지할 정치적 필요가 사라지면서 이 묘제도 소멸하였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기존의 **왜인설과 재지수장설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초기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는 왜계 이주 유력자설이 상대적으로 높은 설명력을 가질 수 있고, 후기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는 재지수장설이 오히려 높은 설명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산강 전방후원분 문제의 핵심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단일한 질문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가 이 묘제를 사용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영산강 전방후원분은 특정 민족의 고정된 묘제가 아니라 **5세기 말~6세기 중엽 백제 왕권, 규슈계 군사·해상 네트워크, 영산강 재지사회가 접촉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약 1~2세대 동안 나타난 과도기적 정치묘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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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김영심, 2024, 「문헌을 통해 본 전방후원형 고분의 축조 배경과 피장자」, 『백제문화』 71, 5-46.
서정석, 2023, 「구조적 특징을 통해 본 전남지역 전방후원분의 피장자」, 『청계사학』 25, 133-173.
서정석, 2026, 「전남지역 전방후원분의 토착화 과정」, 『백제연구』 83, 107-132.
이문형, 2022, 「호남지역 전방후원분의 피장자와 그 성격」, 『호남고고학보』 72, 136-169.
최영은, 2025, 「함평 신덕 1호분의 매장 프로세스와 장송의례」, 『한국문화』 111, 235-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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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 卷第十四, 雄略天皇二十三年條.
국가유산청·고창군, 「고창 칠암리 용산고분」 관련 조사·문화유산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계동 장고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방후원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