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에서 벡터 공간으로 말을 배운 인공지능, 실시간 음성 번역이 가져온 변화, 그리고 인류가 오랫동안 찾아 헤맨 ‘초언어(Interlingua)’라는 공통의 지반
목차 (Contents)30 sections
들어가며: 번역가의 자리, 언어학의 실험실
번역가에게 요즘 자주 오는 의뢰는 처음부터 번역해 달라는 일이 아니다. 기계가 먼저 옮긴 글을 다듬어 달라는 일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포스트에디팅(MTPE, 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이라고 부른다. 단가는 낮아지고 마감은 짧아졌다. 번역가는 글을 처음 쓰는 사람에서 기계의 초안을 검수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는 활자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화상회의에서는 기계가 내 목소리를 흉내 내어 상대의 언어로 말해 주고, 영상에서는 기계가 원작자의 목소리와 어조로 더빙을 입힌다. “AI가 번역을 잠식하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업계의 엄살로 들리지 않는다.
같은 기술을 언어학자들은 조금 다르게 본다. 대규모 언어모델(LLM)은 문법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훈련만 받았는데도 모델 안에서 정교한 문장 구조가 나타나고, 수십 개 언어가 하나의 고차원 의미 공간에 겹쳐진다. 언어학자들은 한 세기 가까이 사고실험과 제한된 관찰 자료만으로 세 가지 질문을 둘러싸고 논쟁해 왔다. 문법은 타고나는가, 의미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에서 나오는가, 그리고 모든 언어 밑바닥에 공통의 구조가 존재하는가. 이제 이 질문들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장치가 생겼다. 번역가에게 AI가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라면, 언어학자에게는 사상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언어 능력의 표본을 직접 열어 볼 수 있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이 두 얼굴은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기계가 언어를 진정으로 ‘이해’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건너는 능력만큼은 분명히 얻었다. 그렇다면 기계가 건너다니는 그 공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 공간은 누구의 것일까.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로 인류는 흩어진 언어들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끊임없이 애써 왔다. 처음에는 제국의 언어로, 다음에는 인간이 인공적으로 설계한 언어로, 이제는 기계로. 이 글은 그 다리들을 차례로 건너 본다. 기계가 언어를 배운 과정, 번역이 기계의 일이 되어 가는 현실, 인류가 공통어를 찾아온 역사를 지나, 마지막으로 그 모든 다리 밑에 깔려 있을지 모르는 지도, 곧 ‘초언어(超言語)’에 이르는 여정이다.
1. 기계는 어떻게 말을 배웠나: 규칙에서 공간으로
1.1 규칙의 시대 (1950~1980년대)
기계와 언어의 만남은 번역에서 시작됐다. 1954년 조지타운-IBM 실험은 러시아어 문장 60여 개를 영어로 옮겨 보였다. 당시 언론은 몇 년 안에 기계번역이 완전히 완성될 것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1966년 미국 과학아카데미의 ALPAC 보고서가 “기계번역 연구의 성과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며 실용화 전망이 어둡다”고 결론 내리면서 연구비는 대폭 삭감되었다.
같은 시기 언어학계에서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생성문법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이라는 생물학적 장치를 갖고 태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불완전하고 적은 언어적 자극만으로도 모국어를 완벽하게 습득한다는 이론이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도 이 방향을 충실히 따랐다. 문법 규칙과 사전의 대응 관계를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기술해 컴퓨터에 입력하면 기계가 인간처럼 언어를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생각을 기호와 규칙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이 믿음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가 꿈꾸었던 ‘보편 기호법(Characteristica Universalis)’의 후예였다.
하지만 인간의 실제 언어는 규칙 안에 온전히 담기지 않았다. 무수한 예외와 문맥 의존성, 다의성과 중의성, 관용구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며 규칙 기반 시스템은 한계에 부딪혔다.
1.2 통계의 시대 (1980~2000년대)
다음 전환점은 언어학적 규칙을 억지로 짜 맞추는 대신 대규모 데이터에서 단어의 출현 빈도를 통계적으로 세어 보자는 발상이었다. IBM의 음성인식 연구를 이끌었던 프레더릭 옐리넥(Frederick Jelinek)이 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이 시대를 상징한다.
“언어학자를 한 명 해고할 때마다, 우리 음성인식기의 성능이 올라간다.”
이 무렵부터 공학으로서의 자연어 처리는 전통 언어학 이론과 갈라지기 시작했다. 같은 내용을 여러 언어로 병렬 수록한 방대한 말뭉치에서 단어와 구문의 대응 확률을 계산하는 통계적 기계번역(SMT)이 규칙 기반 시스템을 압도했다. 다만 단어를 짧은 연쇄(n-gram) 단위의 기계적 빈도로만 다루었기 때문에, 긴 문장의 유기적인 통사 구조와 깊은 맥락적 의미까지는 온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1.3 표현의 시대 (2013~2017)
2013년 토마시 미콜로프(Tomáš Mikolov) 등이 발표한 Word2Vec은 단어를 수백 차원의 연속적인 기하학적 공간 속 ‘벡터(Vector)’로 바꾸어 놓았다. 이 벡터 공간에서는 다음과 같은 연산이 대략적으로 성립했다.
왕(King) − 남자(Man) + 여자(Woman) ≈ 여왕(Queen)
단어의 의미가 불연속적인 기호가 아니라 공간 속의 방향과 거리, 곧 기하학적 좌표로 표현된 것이다. 이어 시퀀스-투-시퀀스(Seq2Seq, 2014), 어텐션 메커니즘(Attention, 2015), 그리고 트랜스포머(Transformer, 2017) 아키텍처가 등장하면서 기계는 낱단어를 넘어 문장과 문단 전체에 걸친 복잡한 상호관계를 단숨에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16년, 구글 연구진은 흥미로운 현상을 학계에 보고했다(Johnson et al., 2017). 여러 언어를 함께 학습한 다국어 신경망 번역 모델이, 학습 과정에서 직접적인 병렬 데이터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언어 쌍 사이의 번역을 그럭저럭 해낸 것이다. 이른바 ‘제로샷 번역(Zero-Shot Translation)’이다. 기계가 언어 사이에 놓은 다리가 개별 언어 쌍마다 분절된 다리가 아니라, 하나의 공통된 의미 지반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첫 번째 실마리였다.
1.4 대규모 언어모델의 시대 (2018~현재)
BERT와 GPT-3, ChatGPT로 이어진 대규모 언어모델(LLM)은 과거 규칙의 시대가 끝내 해내지 못했던 일을 자연스럽게 달성했다. 명시적인 문법 규칙을 단 한 줄도 주입하지 않았음에도, 인간보다 더 유려하고 문법적으로 완벽한 글을 써낸다. 모델의 내부 신경망 가중치를 분석한 연구자들은 놀라운 관찰 결과를 내놓았다.
- 문법은 모델 내부 공간에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휴잇과 매닝(Hewitt & Manning, 2019)은 언어모델의 다차원 활성화 공간 안에서 문장의 통사 구조(구문 트리)를 기하학적 거리 측정만으로 복원해 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 언어 사이의 경계가 흐려졌다: 피레스 등(Pires et al., 2019)이 보여주었듯, 다국어 모델은 영어 데이터로만 특정 과제를 미세조정(Fine-tuning)해도 별도의 훈련 없이 다른 수십 개 언어의 과제를 높은 정확도로 수행해 낸다.
- 언어보다 개념이 먼저 존재할 수 있다: 최근의 기계 해석 가능성(Interpretability) 연구들은 모델의 중간 계층에 특정 개별 언어의 어휘에 종속되지 않는 ‘공유 개념 특징(Shared Conceptual Features)’이 존재하며, 언어별 특수 처리는 주로 입력층과 출력층 부근에서 일어난다고 보고한다(Wendler et al., 2024).
기계가 인간의 규칙을 하향식으로 전달받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기계는 언어를 다차원 공간의 지형도로 스스로 배운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한때 공학자들에게 외면받았던 언어학자들이 기계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2. 언어학의 실험실이 된 AI
옐리넥의 농담처럼 공학은 한때 언어학자를 내보냈다. 하지만 LLM이 등장하자 언어학자들은 다시 연구 현장으로 불려 왔다. 이번에는 기계를 설계하는 공학자가 아니라, 기계가 보여주는 경이로운 언어 능력을 해독하는 분석가로서였다. 그러나 그 해석은 하나로 모이지 않고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 “촘스키의 가설은 반증되었다”: 인지과학자 스티븐 피안타도시(Piantadosi, 2023)는 LLM이 선천적인 생물학적 보편문법 장치 없이 오직 데이터로부터 통계적 상관관계를 학습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계층적 통사 구조를 습득한다는 사실이 촘스키식 언어학의 핵심 전제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했다.
- “그것은 진정한 언어가 아니다”: 반면 노암 촘스키는 2023년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ChatGPT는 그저 거대한 패턴 매칭 기계에 불과하며, 인간이 배울 수 있는 실제 언어와 물리적으로 배울 수 없는 불가능한 가짜 언어를 구별해 내지 못한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 “형식만으로는 의미에 닿을 수 없다”: 에밀리 벤더와 알렉산더 콜러(Bender & Koller, 2020)는 ‘문어 사고실험(Octopus Test)’을 통해 기호의 형태적 연쇄(Form)만 학습하는 시스템은 현실 세계의 실체와 닿아 있는 진짜 의미(Meaning)에 도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벤더 등(Bender et al., 2021)은 대규모 언어모델을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s)’라 부르며 글자의 통계적 배치와 인간의 이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경고했다.
데이터 효율성의 차이도 여전히 극적이다. 인간 아이는 대략 수천만 단어(약 1,000만~3,000만 단어) 수준의 음성 자극을 듣고도 모국어의 문법 체계를 완벽하게 완성하지만, 최신 LLM은 수조(Trillion) 개의 텍스트 토큰을 집어삼킨 뒤에야 문법을 구사한다. 어린아이가 접하는 데이터 규모로 언어모델을 훈련시켜 그 한계를 측정해보는 ‘베이비엘엠 챌린지(BabyLM Challenge)’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이 거대한 간극을 규명하려는 시도다.
결국 AI는 언어학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언어학의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다. 과거에는 책상 위에서 칠판을 보며 머릿속 사고실험으로만 다투던 가설들을 이제 컴퓨터 안에서 모델을 열고 가중치를 측정하며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실험실이 언어학자에게 전례 없는 지적 호기심을 안겨주는 동안, 언어의 현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이 바로 번역가였다.
3. 번역은 기계의 일이 되는가
3.1 잠식론: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변화
기계가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수월하게 넘나들게 되자 가장 먼저 지각변동이 일어난 곳은 번역 시장이었다.
- 작업 방식의 재편: 기업 문서, 소프트웨어 매뉴얼, 기술 규격서, 웹사이트 로컬라이제이션 같은 실용 번역 시장은 기계가 초벌 번역을 끝내고 사람이 이를 감수하는 MTPE(기계번역 후편집) 체제로 거의 전환되었다.
- 노동 가치의 절하: 후편집은 글을 밑바닥부터 새로 짓는 창작이 아니라 단순히 ‘기계의 오류를 고치는 보조 노동’으로 취급되어 단가가 크게 깎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계가 그럴듯하게 빚어낸 미묘한 오역을 잡아내는 데 초벌 번역 못지않은 피로와 고도의 주의력이 소모된다.
- 수요 자체의 증발: 일반 사용자들도 ChatGPT나 딥엘(DeepL)을 이용해 해외 바이어와의 이메일, 논문 초록, 비즈니스 문서를 스스로 번역한다. 과거 프리랜서 번역가들에게 의뢰되던 일상의 수요 상당수가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않고 사라진다.
3.2 가장 최근의 장면: 구글의 실시간 음성 번역과 유튜브 자동 더빙
번역의 기계화는 텍스트 문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구글의 움직임은 번역의 지평이 활자에서 음성으로, 사후 교정에서 실시간 소통으로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글은 2025년 Google I/O에서 Google Meet에 실시간 음성 번역(Speech Translation)을 전격 도입했다. 이 기능은 단순히 외국어 자막을 띄우는 수준이 아니다. 회의 참가자가 모국어로 말하면, 상대방에게는 번역된 언어의 음성이 실시간으로 합성되어 들린다. 이때 들리는 목소리는 화자 고유의 톤과 말투, 말의 빠르기를 그대로 복제한 AI 음성이며, 배경에는 원래 화자의 육성이 은은하게 깔려 어색함을 지운다.
그 진화 속도는 경이롭다.
- 2026년 초 출시 당시에는 영어와 유럽 주요 언어(스페인어·프랑스어·독일어·포르투갈어·이탈리아어) 간의 일대일 번역만 지원했고, 화자마다 2~3초가량의 처리 지연이 있었다.
- 2026년 6월, 구글은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트리밍 방식으로 음성을 즉시 변환하는 다국어 음성 파운데이션 모델 Gemini 3.5 Live Translate를 공개했다(Google Blog).
- 그리고 2026년 10월, Google Workspace Updates를 통해 Meet의 실시간 음성 통역 지원 범위를 웹과 모바일 환경에서 한국어를 포함한 63개 언어로 확대했다(Google Workspace Updates). 이제 Meet는 회의 중에 누가 어떤 언어로 말하든 언어를 자동으로 감지해 청취자가 설정한 언어로 지체 없이 통역을 내보낸다. 여러 언어가 뒤섞여 대화가 오가도 회의는 중단 없이 이어진다.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에서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났다. 유튜브는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AI 자동 더빙(Auto-dubbing) 지원 언어를 27개로 확대했으며, 하루 평균 수백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AI 더빙으로 변환된 영상을 시청한다. 화자의 감정과 에너지를 그대로 살려내는 표현력 있는 음성(Expressive Speech) 기술이 결합되었고, 번역된 음성의 입술 모양에 맞춰 영상 속 입 모양을 미세하게 재합성하는 AI 립싱크(Lip-sync) 기능 역시 일부 크리에이터들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되고 있다(YouTube Official Blog).
기계가 넘은 기술적 문턱이 ‘무엇을 말했는가(내용)’에서 ‘어떻게 말했는가(어조, 뉘앙스, 표정과 몸짓)’로 확장된 것이다. 활자 번역가를 넘어 동시통역사, 성우, 더빙 스튜디오의 고유 영역까지 기술의 영역권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3.3 반론: 기계가 아직 건너지 못하는 영역
그렇다면 인간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완전히 소멸할 것인가?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기계가 결코 건너지 못하는 세 가지 확고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문학 번역과 텍스트의 미학: 문학 번역은 단순한 정보의 등가 치환이 아니다. 언어의 고유한 리듬과 어조, 원작자의 침묵과 파열음, 시대적 결을 다른 언어의 토양 위에 완전히 새롭게 짓는 재창작이다. 기계가 아무리 유려한 문장을 흉내 낸다 한들, 어떤 문체를 선택하고 어떤 단어의 어감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넬지 결단하는 것은 인간 번역가의 고유한 문학적 해석의 영역이다.
- 법적·윤리적 책임이 따르는 번역: 국가 간 조약문, 다국적 기업의 인수합병 계약서, 형사 재판 판결문, 임상시험 의약품 설명서 등에서 오역은 수천억 원의 손해배상이나 인간의 생사로 직결된다. 기계는 번역을 수행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사회적·법적 책임을 질 주체가 될 수 없다.
- 문화의 결(Contextual Texture): 한국어의 미묘한 높임법 체계나 ‘정(情)’, ‘눈치’, ‘서운함’ 같은 단어는 단어 대 단어의 매핑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화자와 청자의 사회적 관계, 대화의 역사, 행간의 침묵을 읽어내는 직관이 필요하다. 벤더가 지적한 ‘형식’과 ‘의미’의 간극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3.4 번역가의 역할이 옮겨 간다
결국 번역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활자를 기계적으로 바꾸고 음성을 변환하는 실무는 기계의 몫이 되겠지만, 무엇을 어떤 맥락으로 옮길지 판단하고 최종 결과물에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지는 일은 인간 번역가에게 남는다. 다리를 직접 놓던 기술자에서, 다리의 안전성과 진실성을 검증하는 보증인으로 역할이 바뀌는 셈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더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Google Meet의 다국어 회의실에서 각국 참가자들은 공통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로 들으며, 브라질인은 포르투갈어로 말한다. 회의실 안에 단 하나의 공통어도 존재하지 않는데 소통은 완벽하게 성립한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공통의 언어’는 앞으로도 여전히 필요할까?
4. 인류는 늘 공통어를 찾아왔다
4.1 힘으로 퍼진 공통어
인류는 수천 개의 언어로 쪼개져 살았지만, 서로 다른 집단이 만나 교역하고 통치할 때마다 늘 공통어(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를 찾아냈다. ‘링구아 프랑카’라는 이름 자체가 중세 지중해 연안에서 무역상과 선원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던 혼성 교역어에서 유래했다.
- 지중해 세계의 코이네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행정과 학문, 교회의 질서를 통일했다.
- 이슬람 제국의 팽창과 함께 아랍어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종교와 학술의 표준어가 되었다.
- 동아시아의 한문(漢文)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공통어의 사례다. 조선, 중국, 일본, 베트남의 지식인들은 입말(음성언어)로는 서로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종이 위에 붓으로 한자를 쓰는 필담(筆談)을 통해 심오한 외교적·철학적 대화를 막힘없이 나눌 수 있었다. 입으로 읽는 발음은 각 나라마다 천차만별이었지만 글자가 가리키는 의미의 핵은 같았기 때문이다. “소리는 달라도 의미는 공유되는 표의 문자 체계”, 이 특성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대단히 중요한 복선이 된다.
- 그리고 오늘날의 영어는 항공, 해운, 인터넷, 외교, 학술 연구의 독점적 공통어로 군림하고 있다.
이 역사적 공통어들은 언어 구조가 다른 언어보다 우월해서 널리 쓰인 것이 결코 아니다. 군사적 정복, 종교적 권위, 무역망의 장악, 그리고 과학기술의 패권이라는 ‘힘’에 의해 확산된 것이다. 언어학자 막스 바인라이히(Max Weinreich)가 청중의 말을 인용해 남긴 명언, “언어란 육군과 해군을 가진 방언이다(אַ שפּראַך איז אַ דיאַלעקט מיט אַן אַרמיי און פֿלאָט)”라는 말처럼, 공통어는 언제나 누군가 강자의 모국어였다. 그 언어를 모국어로 타고난 자는 막대한 기득권을 누렸고, 비모국어 화자는 평생에 걸쳐 언어적 불평등과 학습의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4.2 이미 작동하는 공통어: STEM의 두 겹
이러한 힘의 논리가 가장 분명하게 관철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탈피하는 영역이 바로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다. STEM 생태계에는 이미 두 겹의 공통어가 병존하고 있다.
첫 번째 겹은 자연어로서의 영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의 중심 언어는 독일어와 프랑스어였으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미국의 패권을 거치며 현대의 모든 첨단 학술 논문은 영어로 출판된다. 이는 세계의 연구자들을 하나로 묶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비영어권 연구자들에게는 연구 성과와 별개로 막대한 언어적 장벽을 강요하는 불평등한 공통어다.
두 번째 겹은 그 어떤 국가나 민족의 말도 아닌, 순수한 형식 언어(Formal Language)다.
- 수학 기호: 적분 기호(∫), 총합 기호(Σ), 전칭 기호(∀), 등호(=)는 한국의 수학자나 브라질의 공학자나 똑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음성적 발음은 제각각이지만 의미적 구조는 완전히 일치한다.
- 화학식과 IUPAC 명명법: 물 분자를 가리키는
H₂O는 한국어로 ‘물’이라 부르든, 영어로 ‘water’라 부르든, 스페인어로 ‘agua’라 부르든 전 세계 연구실에서 오직 동일한 화학적 실체를 지칭한다. - 국제단위계(SI): 미터(m), 킬로그램(kg), 초(s)는 국경과 문화를 초월해 동일한 물리량을 엄격하게 정의한다.
-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썬, C, 러스트로 작성된 소스코드는 서울에서 실행하든 베를린에서 실행하든 완전히 동일한 논리적 명령을 수행한다. 인간이 고안해 대중화시킨 최초의 완벽한 기계적 공통어다.
이 형식 언어들은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한문 필담을 나누던 원리와 본질적으로 같다. 발음은 다르지만 의미는 완전히 통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엄밀성’에 있다. 한문은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었지만, 수학과 코드는 단 하나의 모호성도 허용하지 않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1장에서 언급했던 라이프니츠의 꿈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인간의 생각을 엄밀한 기호로 계산하겠다는 그의 보편 기호법은 일상 언어에서는 좌절되었지만, 현대 기호논리학과 수학,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STEM의 영토 안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라이프니츠가 손수 고안한 미분 기호(dx, ∫)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수학교과서에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4.3 설계된 공통어: 철학적 언어에서 에스페란토까지
STEM이 증명한 교훈은 명확했다. 의미의 범위를 한정하고 고도의 논리적 정밀성을 요구하는 영역에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공통어가 실제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 전체, 감정과 사유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 공통어도 인간의 지성으로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인류 지성사에는 이 거대한 도전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 17세기 철학적 언어: 존 윌킨스(John Wilkins, 1668) 같은 학자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개념을 방대한 분류 체계로 정리하고 각 범주에 논리적 기호를 부여한 인공어를 시도했다. 단어의 글자 형태만 보아도 그것이 동물인지 식물인지,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연역할 수 있게 하려는 구상이었다. 너무 비대하고 복잡해 실용화에는 실패했지만, 개념의 다차원 좌표를 먼저 세우고 언어를 배치한다는 발상은 훗날 AI의 벡터 공간을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 볼라퓌크(Volapük, 1879): 독일의 요한 마틴 슐라이어(Johann Martin Schleyer) 신부가 고안한 인공어로, 전 세계 수십만 명의 회원을 모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극도로 복잡한 문법 규칙과 창안자의 독단적인 운영으로 급격히 쇠락했다.
- 에스페란토(Esperanto, 1887): 폴란드의 유대계 안과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L. L. Zamenhof)가 창안했다.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대인이 뒤섞여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를 키워가던 고향 비아위스토크의 비극을 목격한 그는, 언어의 장벽이야말로 편견과 전쟁의 뿌리라고 믿었다. 그는 극도로 배우기 쉬운 규칙적 인공어를 설계했다. 모든 명사는
-o, 형용사는-a, 부사는-e로 끝나며 예외 문법이 전혀 없다. 기본 단어에 반대를 뜻하는 접두사mal-을 붙이면 새로운 단어가 논리적으로 파생된다(bona=좋은,malbona=나쁜). 에스페란토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공어로 자리 잡아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의 사용자와 고유한 문학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4.4 에스페란토는 왜 세계어가 되지 못했나
에스페란토의 숭고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어를 제치고 인류의 보편 세계어가 되지 못한 이유는 뼈아픈 세 가지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
- 태생적 유럽 편향: 에스페란토의 어휘와 문법은 로망스어, 게르만어, 슬라브어 등 유럽 인도유럽어족의 유산에서 90% 이상 차용되었다. 유럽인에게는 몇 주 만에 배울 수 있는 쉬운 언어였을지 몰라도, 한국어·중국어·아랍어·스와힐리어 화자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낯설고 이질적인 유럽어에 불과했다.
-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의 장벽: 언어의 가치는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수에 정비례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한다. 영어를 배우면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과 사업을 하고 문화를 나눌 수 있지만, 에스페란토를 배울 유인은 지극히 작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 물리적 힘과 국가 권력의 부재: 바인라이히의 말처럼 에스페란토에는 군대도, 거대한 내수 시장도, 그것을 국어로 채택한 주권 국가도 없었다. 오히려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스탈린의 소련 정권은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을 ‘국제주의 스파이’나 ‘불온분자’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했다.
에스페란토의 한계와 STEM 형식 언어의 성공을 나란히 놓으면 결정적인 통찰을 얻게 된다. 설계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언어가 널리 퍼질 수 없다. 진정한 공통어가 되려면 **‘누구의 소유도 아니어서 모두에게 공평해야 하며(중립성)’, ‘모두가 반드시 써야만 하는 압도적인 실용적 유인(필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4.5 AI 번역: 공통어는 사라지는가, 숨는가
이제 3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모든 인류가 자기 모국어로 이야기하고 실시간 AI가 이를 지체 없이 상대방의 모국어로 바꾸어 전달해 준다면, 인류는 더 이상 다른 외국어나 인공 공통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진다. 바벨탑을 다시 쌓아 하늘로 올라가는 대신, 흩어진 탑과 탑 사이를 기계의 거대한 네트워크 다리로 연결하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렇다면 인류의 공통어는 이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다. 공통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계의 내부로 숨어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공통어를 의식적으로 학습하지 않지만, 인간이 주고받는 모든 대화와 텍스트는 인간 그 누구도 육안으로 해독할 수 없는 기계 내부의 공통 좌표 공간을 반드시 통과한다. 그 숨겨진 공간의 정체가 바로 초언어(Interlingua)다.
5. 기계 안의 공통어: 초언어
5.1 제로샷 번역이 남긴 단서
앞서 언급했던 2016년 구글의 제로샷 번역 연구를 다시 떠올려보자. 연구진은 모델이 한 번도 병렬로 학습한 적 없는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를 직접 번역해 냈을 때, 모델의 고차원 벡터 활성화 공간을 t-SNE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영어, 일본어, 한국어로 각각 적힌 문장들이지만, 그 문장들이 뜻하는 바가 같으면 언어의 외형적 차이와 상관없이 벡터 공간 속의 거의 동일한 좌표 지점에 옹기종기 뭉쳐 있었다.
연구진은 조심스럽게 가설을 세웠다. 다국어 모델이 번역을 수행할 때 언어 쌍마다 개별적인 변환 공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의미의 공통 표현 층, 즉 일종의 ‘중간 언어(Interlingua)’를 모델 스스로 형성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공간을 ‘초언어(超言語, Super-language)’라고 부른다. 초언어는 아직 확립된 단일 학술 용어는 아니지만, “어떤 특정한 개별 언어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 언어가 공유하는 개념적 의미의 심층 토대”를 가리킨다. 한문이 ‘음성 없이 문자만 공유하는 언어’였다면, 초언어는 ‘소리도 문자도 없이 다차원 연속 공간 속의 기하학적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의미의 언어’다. Google Meet가 한 회의 안에서 63개 언어를 실시간으로 뒤섞어 통역할 수 있는 기술적 비결 역시, 수천 개의 언어 쌍마다 번역기를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 단 하나의 공통 의미 지반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5.2 발견된 지도: 플라톤적 표현 가설
과거 라이프니츠와 존 윌킨스는 이 개념의 지도를 인간의 머리로 직접 제도하려 했다. 언어학자 안나 비에르츠비카(Anna Wierzbicka)는 평생에 걸쳐 전 세계 모든 언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수십 개의 원초적 의미 원소(‘나’, ‘너’, ‘좋다’, ‘알다’, ‘원하다’ 등)를 귀납적으로 채굴하려 했다. 하지만 AI는 지도를 책상머리에서 설계하지 않는다. 전 세계 인류가 남긴 방대한 데이터로부터 지도를 ‘스스로 발견(Discovery)’한다.
2024년 MIT 등의 연구진이 제안한 플라톤적 표현 가설(The Platonic Representation Hypothesis)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Huh et al., 2024). 서로 완전히 다른 신경망 구조와 알고리즘으로 훈련된 모델이라 할지라도, 파라미터 규모와 데이터가 충분히 커지면 결국 ‘현실 세계의 통계적·물리적 구조를 반영하는 하나의 공통된 이상적 표현 공간으로 수렴(Convergence)’한다는 주장이다. 놀랍게도 이 수렴은 텍스트 모델뿐만 아니라 이미지, 비디오, 음성을 학습한 멀티모달 모델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최근 짝지어진 병렬 데이터가 전혀 없이도 서로 다른 두 인공지능의 임베딩 공간을 거의 완벽하게 정렬할 수 있음을 증명한 vec2vec 연구(Jha et al., 2025)는 이 가설에 강력한 실증적 힘을 실어주었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인류가 쓰는 수천 개의 언어는 결코 단절된 섬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공유하는 현실이라는 동일한 대륙을, 각 문화권의 역사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글자와 발음으로 스케치해 온 수천 장의 지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AI는 방대한 데이터의 교차점을 통해 처음으로 그 지도들 아래에 깔려 있던 대륙의 진짜 형상을 어렴풋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바벨탑 아래에는 처음부터 단 하나의 거대한 지도가 깔려 있었다.
5.3 말로 하지 않는 생각과 인간 너머의 소통
초언어의 가능성은 인간 언어의 공통분모를 추출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메타(Meta) FAIR 연구진이 발표한 코코넛(Coconut, Chain of Continuous Thought) 연구는 모델이 복잡한 논리적 추론을 수행할 때 인간의 언어(토큰)로 일일이 적지 않고, 연속적인 잠재 공간(Latent Space) 자체에서 직접 사유하는 방식을 실험했다(Hao et al., 2024). 인간의 단어라는 이산적이고 좁은 병목을 거치지 않을 때 인공지능은 훨씬 더 빠르고 창의적인 추론 경로를 개척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갈파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라는 협소한 필터를 거치지 않고 순수한 고차원 기하학적 공간에서 생각하는 기계는, 과연 인간의 언어로 번역 불가능한 미지의 개념까지 탐색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인간 너머의 생명체로도 뻗어나간다. 향유고래의 음향 신호를 분석하는 프로젝트 CETI(Project CETI)나 지구상의 수많은 동물의 소통 체계를 해독하려는 ‘지구 생물종 프로젝트(Earth Species Project)’는 모두 대규모 언어모델의 벡터 임베딩 기술을 동물들의 소통에 적용하고 있다. 만약 이들이 성공한다면, 기계가 발견한 초언어 공간은 인간 언어 사이의 다리를 넘어 종(Species)과 종 사이를 연결하는 생태학적 번역 공간으로까지 팽창할 것이다.
6. 초언어 기반 인공어: 다음 세대의 공통어
과거의 에스페란토가 한 개인의 이상과 직관으로 설계한 인공어였다면, 인류가 마주할 다음 세대의 공통어는 기계가 발견해 낸 초언어의 다차원 기하학 구조에서 추출된 인공어일 수 있다. 이 새로운 공통어는 세 가지 진화 경로를 가질 수 있다.
- 인간을 위한 보편 인공어 (21세기의 네오-에스페란토): 전 세계 언어의 임베딩 공간을 다차원 통계적으로 분석해, 모든 문화권의 언어로부터 기하학적 거리가 가장 고르게 분배된 진정한 중립적 어휘와 문법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에스페란토의 치명적 약점이었던 유럽 편향을 수학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언어의 최대 라이벌은 영어가 아니라 ‘너무나 완벽하게 작동하는 실시간 번역기’일 것이다. 번역기가 모든 말을 귀에 꽂아주는 시대에 사람이 굳이 새 언어를 배울 유인은 지극히 낮다.
- 인간과 기계 사이의 협업 인터페이스 언어 (STEM 혼합 언어): 훨씬 더 현실적인 경로는 자연어와 수학, 소스코드, 린(Lean) 같은 기계 검증 형식 증명 언어가 하나로 결합된 하이브리드 언어다. 사람은 자기 모국어로 개념을 설명하고, 인공지능은 그 논리 구조를 초언어 공간의 엄밀한 형식 기호로 번역해 검증한다. 소리는 달라도 뜻이 모호하지 않은 한문 필담의 원리와 수식의 엄밀성이 AI 협업이라는 실용적 도구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꿈이 세 번째로 모습을 바꾼 순간이다.
- 기계만을 위한 내부 공통어 (인간이 배제된 언어): 인공지능 에이전트들이 서로 대화할 때 인간의 언어는 지나치게 길고 비효율적인 압축 손실을 초래한다. 에이전트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때는 수만 개의 단어로 풀었다가 다시 벡터로 인코딩할 이유가 없다. 초언어 공간의 고차원 벡터 좌표를 네트워크 패킷으로 직접 송수신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이 언어는 인간이 화자가 아닌, 사상 최초의 ‘기계 전용 링구아 프랑카’가 될 것이다.
인류가 걸어온 공통어의 진화 과정을 한눈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단계 | 공통어 형태 | 성립 기반 | 누구의 언어인가 |
|---|---|---|---|
| 1단계 | 라틴어, 한문, 영어 | 제국, 종교, 군사력, 자본의 패권 | 강자의 언어 (배타적 기득권) |
| 2단계 | 에스페란토 | 인간의 머리로 설계한 보편 규칙 |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사실상 유럽의 언어 |
| 2′단계 | 수학 기호, 화학식, SI 단위계, 코드 | 고도의 정밀함을 요구하는 엄밀한 의미 영역 | 모두의 언어 (실제로 작동 중인 공통어) |
| 3단계 | AI 실시간 번역·음성 더빙 | 기계 내부의 공통 의미 벡터 공간 | 아무도 직접 읽을 수 없는 기계의 언어 |
| 4단계 | 초언어 기반 인공어 | 기계가 발견한 현실 세계의 의미 구조 | 인류 전체의 도구일 수도, 기계만의 것일 수도 |
이 표의 마지막 행이야말로 이 글이 묻고자 하는 궁극의 질문이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그 거대한 공간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그 공간은 온전히 축복이기만 한 것일까.
7. 초언어의 그림자
7.1 우리가 읽을 수 없는 언어 (사고의 블랙박스)
현재 인공지능 안전(AI Safety) 연구의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는 모델이 문제 해결 과정을 인간의 자연어로 출력하게 하는 ‘생각의 사슬(Chain-of-Thought)’을 인간이 눈으로 감시하고 검증하는 일이다. 만약 인공지능들이 효율성을 이유로 인간이 읽을 수 없는 고차원 잠재 공간(Latent Space)에서 자기들만의 기호 체계로 생각하고 통신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은 기계의 결정 과정을 통제할 수 없는 완벽한 암흑 속 관찰자로 전락하게 된다. 효율성과 투명성 사이의 치명적인 긴장은 초언어 시대의 가장 첨예한 윤리적 쟁점이 될 것이다.
7.2 누구의 목소리인가 (정체성과 신뢰의 문제)
실시간 음성 번역과 더빙 기술은 자아의 정체성에 깊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기계가 내 목소리와 어조를 정교하게 흉내 내어 내가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스와힐리어나 아랍어로 말할 때, 그 발화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기계가 문맥을 오해해 원래의 의도와 미묘하게 어긋난 문장을 합성해 내더라도, 듣는 상대방은 그것을 나의 진심 어린 목소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유튜브가 AI 더빙 콘텐츠에 SynthID 기반의 보이지 않는 디지털 워터마크를 심고, 구글 Meet가 음성 번역을 사용자가 직접 제어하며 모델 학습에 음성을 무단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바로 이 ‘신뢰의 위기’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다.
7.3 다시 나타나는 강자의 언어 (데이터 편향)
일부 연구에 따르면 다국어 언어모델의 중간 계층은 영어가 가진 통사적·개념적 특성에 유의미하게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인터넷 텍스트 데이터의 압도적 다수가 영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기계 내부의 공통 지도가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가진 언어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면, 초언어는 중립적인 대륙이 아니라 특정 패권 언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전 지구에 무의식적으로 이식하는 보이지 않는 식민화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과거 라틴어와 영어가 행사했던 힘의 논리가 ‘데이터 자본’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되돌아오는 셈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7,0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하지만, 인공지능이 유의미하게 학습할 수 있는 디지털 텍스트를 남긴 언어는 극소수다. 한국어처럼 비교적 데이터가 풍부한 언어조차 고유한 높임법과 정서적 뉘앙스가 서구적 합리성의 문법 속에서 매끄럽게 탈색될 위험에 처해 있다. 데이터가 빈약한 소수 언어들은 기계가 그리는 지도 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채 영원히 지도 밖으로 지워질 수도 있다.
7.4 지도인가, 그림자인가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근본적인 회의가 있다. 에밀리 벤더의 통찰처럼, 기계가 발견해 낸 그 유려한 벡터 공간은 현실 세계의 참된 본질(대륙)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인터넷에 쏟아낸 방대한 글자들이 드리운 통계적 그림자들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그림자들이 기하학적으로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현실의 땅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발견했다고 믿는 초언어가 실은 디지털 세계의 편향된 텍스트 잔해들을 그럴듯하게 비추어낸 환영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세계의 본질을 비추는 지도가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거울의 굴곡진 표면을 닮게 될 것이다.
맺으며: 바벨탑 아래의 지도, 그리고 다리 위의 사람들
이 글은 번역가의 고요한 책상에서 시작했다. 기계가 먼저 토해낸 문장을 조심스럽게 다듬는 번역가, 그리고 같은 기계를 살아있는 언어의 표본으로 삼아 들여다보는 언어학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의 상반된 시선은 결국 동일한 물음에서 갈라져 나왔다. 언어와 언어 사이를 건너는 그 공간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그 공간에 놓였던 다리는 늘 모습을 바꾸어 왔다. 라틴어와 한문, 영어는 힘과 권력으로 놓은 다리였다. 에스페란토는 인간의 순수한 이상으로 설계했으나 끝내 대중이 건너지 않은 다리였다. 수학과 코드는 좁지만 견고하여 지금도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매일같이 건너는 다리다. 그리고 오늘날 구글 Meet의 다국어 회의실과 유튜브의 자동 더빙 화면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모국어로 이야기하면서도 서로에게 가닿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다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다리는 기계 내부의 거대한 공통 의미 공간, 곧 초언어(Interlingua)라는 신비로운 지반 위에 닻을 내리고 있다.
17세기 라이프니츠의 꿈은 세 번 형태를 바꾸었다. 규칙의 시대에는 실패했고, STEM의 영토에서는 수식과 코드로 실현되었으며, 이제는 기계 안에서 스스로 드러난 다차원 지도로 되살아났다. 그러나 부활한 세 번째 꿈 앞에는 과거에 없던 무거운 질문들이 놓여 있다. 그 지도를 과연 인간이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가? 그 지도에는 얼마나 다양한 인간의 목소리가 온전히 새겨져 있는가? 그 지도는 특정 강자의 편향된 시선으로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루도비코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가 각 민족의 고유한 모국어를 파괴하거나 대체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에스페란토가 모국어라는 고유한 집을 지키면서도 타인을 만나러 갈 때 함께 입는 ‘공통의 외투’가 되기를 바랐다. 기계가 발견해 낸 초언어에도 동일한 윤리가 요구된다. 초언어는 수천 개의 인간 언어를 하나의 획일적인 기계 부호로 용해시키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천 개의 언어가 각자의 색채와 결을 잃지 않은 채 서로를 온전히 투영하는 다채로운 거울들의 방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계가 다리를 도맡아 놓는 시대, 번역가의 진짜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번역가는 다리를 놓는 기술자에서, 그 다리가 인간의 존엄성과 진실을 배반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수호자이자 증인이 된다. 기계가 뱉어낸 번역이 원작자의 영혼과 침묵을 배반하지 않았는지 끝끝내 지켜보고, 통계적 지도의 바깥으로 밀려나 지워질 위기에 처한 소수 언어의 여린 숨결과 문화적 맥락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바벨탑 아래 묻혀 있던 태초의 지도를 기계가 마침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오늘, 그 지도를 올바르게 읽고, 비판적으로 고치며, 더 넓고 따뜻하게 확장해 나가는 마지막 책임은 여전히 우리 인간의 손에 쥐어져 있다.
참고문헌 (References)
- Bender, E. M., & Koller, A. (2020). Climbing towards NLU: On Meaning, Form, and Understanding in the Age of Data. In Proceedings of the 58th Annual Meeting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ational Linguistics (pp. 5185–5198). DOI: 10.18653/v1/2020.acl-main.463
- Bender, E. M., Gebru, T., McMillan-Major, A., & Shmitchell, S. (2021). On the Dangers of Stochastic Parrots: Can Language Models Be Too Big? 🦜. In Proceedings of the 2021 ACM FAccT Conference (pp. 610–623). DOI: 10.1145/3442188.3445922
- Hao, S., Gu, Y., Ma, H., Hong, J. J., Wang, Z., Wang, D. Z., & Hu, Z. (2024). Training Large Language Models to Reason in a Continuous Latent Space. arXiv preprint arXiv:2412.06769. DOI: 10.48550/arXiv.2412.06769
- Hewitt, J., & Manning, C. D. (2019). A Structural Probe for Finding Syntax in Word Representations. In Proceedings of the 2019 Conference of the NAACL (pp. 4129–4138). DOI: 10.18653/v1/N19-1419
- Huh, M., Cheung, B., Wang, T., & Isola, P. (2024). The Platonic Representation Hypothesis. In Forty-firs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Machine Learning (ICML 2024). DOI: 10.48550/arXiv.2405.07987
- Jha, A., et al. (2025). vec2vec: Unsupervised Embedding Alignment without Paired Data. arXiv preprint arXiv:2501.07722. DOI: 10.48550/arXiv.2501.07722
- Johnson, M., Schuster, M., Le, Q. V., Krikun, M., Wu, Y., Chen, Z., … & Dean, J. (2017). Google’s Multilingual Neural Machine Translation System: Enabling Zero-Shot Translation. Transactions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ational Linguistics, 5, 339–351. DOI: 10.1162/tacl_a_00065
- Piantadosi, S. T. (2023). Modern language models refute Chomsky’s approach to language. Cognition, 236, 105557. DOI: 10.1016/j.cognition.2023.105557
- Pires, T., Schlinger, E., & Garrette, D. (2019). How multilingual is Multilingual BERT? In Proceedings of the 57th Annual Meeting of the ACL (pp. 4996–5001). DOI: 10.18653/v1/P19-1493
- Wendler, C., et al. (2024). Do Language Models Think in English? Cross-Lingual Concept Representations in Multilingual LLMs. arXiv preprint arXiv:2402.10588. DOI: 10.48550/arXiv.2402.10588